멍하니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누구처럼 1분 1초가 아깝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노력해 보려고 한 적은 있으나 불가능에 가깝다.
뭐, 말이 1분 1초일 뿐이지
막연하게 표현해 보자면
뭔가 정말 열심히 본인이 노력할 수 있는 분야가
서로가 다름을 분명히 아니까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곳을 조금 더 열심히 팔 뿐이지
하지만 나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하려는 마음이 절대로 없다.
그것은 내가 완벽주의니 뭐니를 따지는 것이 아닌
이제 그만 실패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가깝다.
그저 꿈이나 취미에 가까울 수 있는
단순한 음악, 피아노같은 것도
첫걸음도 떼지 못한다.
반대로 그 말은
내가 저걸 한다는 걸 주저하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간절하지도 않은
정말 좋아하면 못할 게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정말로 좋아하면
그 무엇도 못할 것이 없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고
그걸 위해서 계속 반복해서 노력하는 나의 과몰입이 좋고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알지만
나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30% 이상은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감이 좋다고 잘하지만
정말로 감이 좋은 것이 맞을까?
나는 그저 환영같은 꿈이나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보통 두뇌 싸움에 가까웠다.
단순한 것부터 디테일한 것까지도
혼자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내가 무엇에 자신이 없는지 명확히 알고 있고
그것이 현재 내가 좋아하는 분야라고 해도
내가 자신이 없는 부분이 뭔지 정확히 알지만
그 단점을 메꾸려는 무언가의 시도와 노력보다는
나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더 넓히는 방식을 선호한다.
나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나만 알 뿐이지만 말이다.
남이 나의 장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들었을 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좋은 말과 칭찬은 언제나 고맙고 좋지만
왜 그렇게 느껴지는가를 항상 되물어본다.
나는 사실 그 정도의 능력이 없기도 하지만
다른 이의 시선 또한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또한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내가 언제나 진실된 행동만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언제부턴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
내가 아닌 나를 행동하고 있다.
원래의 내가 하는 행동과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행동이
다름을 인지하고 있음을 자명하게 알고 있다.
나는 위선자에 가깝다.
악과 선을 공존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나는 그릇에 맞지도 않게 선을 지키려고 한다.
나는 항상 약자의 편이고, 선의 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나의 방식은
반드시 정의로부터 나오는 언행이기에
내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나는 꽤나 쓰레기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정의나 선을 논하는 내가 이렇게까지 애매해진 것은
도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건 도박도
돈을 벌어야 하는 도박도
미래에 온전히 맡기는 과거의 도박도
현재의 내가 반드시 개선될 수 있다는 도박도
언젠가는 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도박도.
그 모든 도박이 쌓이고 쌓여서
내 무의식에는 스트레스와 긴장이
극도로 매우 쌓여있을 것이다.
온전히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없을 정도기에
사실 두 달 전부터 꽤나 고생하고 있었다.
물론 잠을 못 자는 건 대부분이 그렇지만
요즘 다시 환각이나 환청이 매우 늘었다.
그와 동시에 꿈의 기억과 현실의 기억이 섞이는 현상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체험하고 싶지 않은 경험들인데
내가 나를 붙잡기엔 혼자서는 매우 어려운 길인데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항상 혼자였기 때문이고 현재 진행형이니까.
그저 내가 위로받을 수 있는 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으로써
일종의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내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나 친구다.
현재 그런 사람이 없기에 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좋아한다라는 말은 되게 애매한 말이다.
앞의 오는 음절에 따라 의미가 바뀌기 때문이다.
친구로서, 이성으로서, 연인으로서, 가족으로서 등등
하지만 나랑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나는 친구의 벽도 되게 높은 편이다.
내가 마주 보고 있는 이 벽에 적힌 글도
언제까지 적어야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기적이기에 나를 이해해 줄 친구란 매우 적다.
또한 나에겐 가족이란 개념이 전혀 없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성적으로 좋아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 내게 있어서 제일 어려운 것이
그 무엇보다 이것이 해당된다.
나는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내게 '이성적'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한 사람은 성별도 나이도 상관이 없었다.
무엇을 하는지, 외면적 모습이나 그런 건 전혀 상관이 없었다.
물론 좋아할 것이라면 이성이 더 좋겠지만
상관없이 그 사람의 존재는 내게 있어서
큰 원동력이 되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나는 헌신적인 좋음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무슨 사람일까?
되게 많이 고민을 거듭해 봤는데.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존경하거나 존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생각했다.
존경, 존경이란 쉽게 느낄 수 없는 마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나 보컬을 존경하듯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필히, 나는 존경한다.
그 마음이 나오는 부분은 그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굳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나 인물을 보자면
대단하거나, 내가 못하는 일을 해내거나
성실하거나, 노력이 정말 빛나거나
그 사람 자체가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다.
특히 웬만해서 성실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나 또한 재능이 그렇게 있는 사람은 아니기에 꽤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현실적으로, 현실의 나를 위한 노력이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내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경험을 주었는가?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지난 시절과 노력한 순간, 기억들을 전혀 후회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열심히 했으면, 포기하지 않았으면이라고
후회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나이라고 하면 많은 나이, 적으면 적은 나이지만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느끼고 있기에
더욱 신중하고 또 신중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 압박감을 느낀다.
나는 모험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내가 안정성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인드 변화가 분명히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물론 지금도 존경하는 사람은 있으나
그저 동경에 그치는 사람이기에
나는 왜 나를 위해서 살 수 없는 걸까?
모두가 잘 살 수는 없다.
누군가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해야만 한다면
분명히 나는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할 것이지만
하지만 내가 살아남아서 더 나은 미래를
더 나은 세상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나 또한 나를 선택하겠지만
지금 내가 보는 미래에 더 나은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내가 존재하는가?
애초에 마인드를 고쳐먹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미래다.
나는 마인드를 반드시 고쳐야만 한다.
맞다. 아무도 잘못한 게 아니다.
사회가, 세상이, 그냥 그렇다.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다들 치열하게 경쟁하고 살아남을 뿐인데.
그저 합리화하고 망각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기에 애매한 선에 서있는 쓰레기일 뿐이다.
눈을 뜨는 것이 정말로 나를 위한 일일까?
나는 나를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눈을 뜨고 귀를 닫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해결하면
나는 환각도 환청도 스트레스도 압박감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나는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내가 존경하는 무언가도, 사람도
나의 진취적인 무언가도 다시 생길 수 있을까?
더 이상 애매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까?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는 걸까?
아, 그냥 단순하게 하나만 해결되면 되지 않을까?
그냥 좋아하는 사람만 있으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세상은, 내 이야기는
그걸 쉽게 허락해주지 않는 걸까?
그런 사람만 있다면
나는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안아줄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