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명제 중에서
닭이냐 달걀이냐?
무엇이 먼저인가를 논하는 명제가 있는데
나는 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명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시각으로 봤을 때
나의 감정적 부분이나 정신적 부분을 봤을 때
내가 선천적으로 이런 건지
후천적으로 이렇게 형성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현재의 나를 이루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주가 되고
미래를 형성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내가 진행하는 중일 텐데
그렇다면 나의 본질은 어디에 존재할까?
사실 이런 것 또한 논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더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제를 꺼내야만 하는 이유는
결국에는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단 절대로 나는 절대 선하지 않다.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고
그 과정에서 선에 가까워 보일 뿐이다.
그로부터 나오는 결과물에서 '착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대부분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착하다고 인지할 테니까.
하지만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정말로 내가 감정이 무뎌진 사람이고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째서 무언가에 공감을 하고
또, 희로애락을 느끼거나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많이 느끼는 감정은 거의 슬픔에 가깝다.
그만큼 나는 어릴 때부터 잘 울었고, 잘 들었으니까.
물론 기쁨 또한 자주 느끼겠지만
그건 본질적으로 내 밝음에서 기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는 어째서 무언가를 느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무뎌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 생각을 스스로 의심하는 것일까?
무언가를 먹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럭저럭 먹을만하네"라거나
"꽤 괜찮네, 또 먹어도 좋겠어"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막상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느끼진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이거 진짜 맛있다"라고 느끼며
매번 먹고 싶다고 느껴지는 것도 명확히 존재한다.
즉, 맛을 느끼는 것에서도 감정의 선이 존재한다.
하지만 너무나 먹기 싫거나
피하고 싶은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그건 맛을 표현하는 미각의 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 즉 통증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정을 미각으로 비유하는 과정에 지나치지 않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그런 감정 따위는 쉽게 느끼고 생각하지만
그런 감정조차 느끼고 싶지 않은 상황은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
그것과 똑같다.
내가 아무리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표현을 한다 해도
나 또한 사람이고 동물에 불과할뿐더러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채로
혼자서만 존재하는 삶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고
개미지옥에 갇힌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마음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우울과 외로움은 고통이다.
정신력은 오직 감정만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트라우마는 치명적인 것이다.
우울한 마음이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우울한 생각이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사실 간단하다.
그냥 우울하지 않은 상황만을 추구하면 된다.
간단해 보이지 않겠지만, 사실 정말로 간단한데.
그 간단한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우울이다.
우울은 자신의 선택과 판단에 영향을 끼치며
그 선택과 판단이 틀렸다고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한다.
우울은 사람으로부터 생기지만
우울의 치료 또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결국 바이러스와 치료제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언제나 사람들은 그렇게 단어를 정의했다.
같은 원인인데도 결과가 다르면
좋은 쪽은 좋게, 나쁜 쪽은 나쁘게
예로 들어 부패와 발효가 있다.
그렇기에 우울감은 사람이 지우개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울할수록 다양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울한 사람은 정상적인 사고를 진행하는 것이 어렵기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책을 읽는 효과와 같기에
스스로 더 많은 생각과 통찰을 하게 되고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점점 모래시계의 밑바닥이 많이 찼을 때
비로소 단단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이란 벗어나기 어려운 질병 중 하나다.
하지만 현대인이라면 정신병 하나쯤은 다들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자책할 필요가 없다.
오직 본인만의 잘못이 아니니까.
외로움 또한 그렇다.
무엇 때문에 외롭다고 느끼는가?
친구가 가족이 연인이 없어서?
그것도 원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목표와 꿈이 없다는 것이 가장 외로운 법이다.
한 가지라도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의지가 없는 사람은 외롭다.
그렇기에 습관을 꾸준히 들여서
그 습관이 나의 취미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시작도 순탄치 않다.
일단 내가 이렇게 일기를 쓰자!라고 마음먹은 것이 2018년인데
솔직히 첫 4년간은 거의 글을 많이 적지 못했다.
그만큼 나는 시작하는 것을 정말 못하지만
꾸준히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가속도가 붙으면
지금 이렇게 글을 적고 있는 것처럼
꾸준히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무엇을 할 때 무엇을 느끼는 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내가 감정이 무뎌진 것도 맞지만
나는 분명히 우울하고 외롭다.
그것은 감정이 아닌 고통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는 다르게도 생각한다.
감정이 무뎌진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경험적 차원에서 더 높은 경험을 했고
그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있어서
즉, 나의 경험적 차원의 감정선이 너무 높이 올라갔는데
한 번에 추락해 버려서 다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해도 나의 감정이 돌아올 것이란 보장도 없을뿐더러
사실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틀릴지도 모른다.
분명 나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고
현재에서 무언가를 예측하거나 증명하거나
누군가를 돕거나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공유하거나
그런 행위만으로도 충분한 나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결국 내가 감정을 되찾는 과정이 중요하기에
이것저것 생각도 해보며 시도를 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나의 구원은 가장 가까운 내 트라우마에 있었던 것이다.
꿈과 사람만이 나를 다시 끌어올려줄 수 있음을
늦게 인지했겠지만 미래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런 사람과 꿈이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기도 한데
그래도 시도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는 달려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니까.
나는 언제나 겁이 많고 부끄럼이 많은 사람이기에
고통을 두려워해서 마주 보는 것을 피했을 것이다.
항상 아닌 척을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누구보다 쉽게 상처받고
누구보다 쉽게 감동할 수 있음을 알기에
나의 경험과 공명하는 감정이 있을 때 느낌과 생각이
내 하나의 명제를 증명하고 있다.
줄곧 무표정으로 있겠지만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
매번 반사적으로 웃는 것이 그렇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조금 쓸데없는 글이었을지도 모르겠다.